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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의 방탕한 선지자

팀 켈러의 방탕한 선지자

-요나서는 4장에 걸쳐 두 사건을 이야기하는데

하나님의 명령을 받지만,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도망가지만, 바다에서 붙잡힌, 요나. 폭풍 속에서 구원받고, 그 명령을 수행하지만 자기 생각에 어긋난 결말에 화를 내지.

성경에서 요나 이야기는 세 쪽이거든. 그런데 신약과 구약을 아우르면서 300쪽으로 이야기하는 팀 켈러의 요나 이야기. 표지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실망하고. 은혜를 잃어버리고, 자기 의에 빠져서 나만의 신앙에 자족하고 있는. 신실하다고 자부하고 있는 이 시대의 요나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라고 해. 그 깊이와 넓이를 다 몰라도 한 가지라도 건지면 되겠지?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받은 요나는.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간다.

육로로 가라는 지시에 바다로. 큰 도시로 보냄을 받았는데 세상 끝으로 가는 배를 탔다.

=이스라엘의 적국인 니느웨는 멸망 받음이 당연한 데 왜 구원하시려는지 화가 났다는 것.

=민족을 사랑함이 하나님의 명령보다 컸다는 것이 문제였다고 하네.

*예수님의 이웃사랑 이야기에서.

-가장 실제적인 신체적, 물질적. 경제적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이웃사랑이라는 것. 이것은 신앙 또는 민족과 관계없는 공공선이라는 것.

-이 비유 이면에는 성경 핵심 진리 중의 하나가 있는데,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이야.

-칼뱅은 말하길, 그 자체로 놓고 보면 경멸할 것밖에 남지 않은 이들을 주님처럼 대접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주님의 형상이 찍혀 있어서. 라는 이야기도 있네.

-자기가 사는 도시의 공공선을 추구하는 나그네라는 모델은 신약 교회에 주어진 것이기도 하다고 해.

**하나님을 피해 달아나는 방법 2가지 (3:10-12) : 바울의 말에 의하면.

-부도덕해지고 종교를 떠나는 방식.

-대단히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 됨으로써 하나님을 피하는 것도 가능하다.

ex 누가복음 15장의 두 아들처럼.

-유산을 챙겨 집을 떠난 동생 =아버지의 통제를 벗어나 자신의 마음대로 살고자 함.

-집에 머물면서 순종했던 형 아버지가 동생을 다시 맞을 때 분노를 쏟아냈다.

*폭풍우 속에서 소망, 정의, 고결함을 갖춘 쪽은 요나가 아니라 선장과 뱃사람들.

뱃사람들은 요나 때문에 피해를 보게 되었지만 부당하다고 외치지 않았고. 모두의 유익을 위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는 것. 성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요나를 복수의 표적으로 삼지 않고, 폭력을 해결책으로 내세우지도 않는다.

*뱃사람들이 보여준 것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이라는 것이야.

-일반 은총 교리는 하나님이 민족이나 종교적 신념과 무관하게 인류 전반에 걸쳐 지혜와 도덕적 통찰, 선과 아름다움의 선물을 내리신다는 것. 일반 은총에 힘입은 비신자들은 믿음이 없으면서도 종종 신자들보다 더 의롭게 행동한다. 신앙이 없는 이들에게도 겸손히 대하고 존중할 줄 알아야 하고. 모든 사람의 수고에 감사해야 한다.

**영적 정체성= 배의 선장이 잠자고 있는 요나를 깨워서 물었지.

-당신은 누구인가? = 주인이 누구인가? =신앙의 문제라고 하네.

-어디에서 오는 길이요? = 우리가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물리적 장소와 공간으로 소속감.

-사명은 무엇이오? 쉽게 말하면 뭘 하는 사람이요? -우리 삶의 의미.

**요나가 입을 열었을 때.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라고 시작했고. 이것은 요나의 정체성에서 민족이 우선이었음을 보여준다고 하네.

*요나의 경우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얄팍한 정체성이 하나님을 앞서면 문제가 된다는 것이지. 정체성의 뿌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세상의 힘. 인정. 위안. 지배일 때. 인종차별주의가 되고, 물질만능주의자가 되기도 하고. 미와 쾌락에 중독되거나 불안에 시달리고, 걸핏하면 과로하는 상황이 되기도 한다는 것.

*타자화

-사람들을 타자로 분류하는 것은, 그들이 나와 다른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그들의 이상함에 초점을 맞추고, 그런 특성들로 축소하고, 그들을 비인격화하는 것. 그래서 그 사람들 어떤지 알잖아라고 말하게 되고. 그들과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이야.

*삶에 숨어있는 교묘한 우상들을 보지 못하다.

**요나가 큰 물고기 배속에서 돌파구를 찾기는 하지만 여전히 우월감과 독선이 남아있고. 그로 인해 그가 볼 때 열등한 자들에게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실 때 분통을 터뜨리는데. 결국, 요나의 회개는 부분적이었다는 것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류는 모두 하나님의 소중한 존재이며.

민족과 종교가 달라도 어려움에 처한 모든 사람이 우리의 이웃이라고 강조하네.

*성경에서 말하는 악한 바보들 =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것이라는데 새겨야 할 말이네.

*누군가가 나를 착취하거나 내게 죄를 짓도록 허용하는 것은 상대를 사랑하는 일이 절대 아니라는 것. 상대의 행동을 굳어지게 만들고, 두 사람 모두 파멸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이지. 요것도 새겨들어야 할 일. 마음 약해서 거절 못함이 아니라 어리석다는 것이잖아.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고 물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요나를 그냥 받아주시지도 않고. 홀로 내버려 두지도 않으신다. 요나가 어리석고 잘못된 태도와 행동 패턴에 그냥 안주하도록 두지 않으신다. 폭풍. 물고기. 식물을 보내시고. 거듭 일을 맡기시고. 결국에는 직접 상담하시고 논쟁을 벌이신다.

*우리는 삶을 지혜롭게 꾸려갈 능력을 넉넉히 갖고 있다고, 자신이 실제보다 덕스럽고 정직하고 점잖다고 자연스럽게 믿는다. 이것은 치명적 오류이고. 사탄은 우리가 끝내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오래오래 운이 좋고 번영하는 삶을 누리게 기꺼이 허락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의 상태에 눈을 떠서 뭔가 조치를 취할 수 있기를 원하시고. 그래서 많은 이들의 삶에 폭풍을 보내신다는 것이야.

*요나서의 마지막 몇 절에 따르면, 하나님의 은혜에 잠긴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과 다른 이들을 경멸하지 않고 긍휼과 사랑을 품는 것이라고 하네.

니느웨를 사랑하는 마음 없이 그 앞에서 설교하는 요나를 꾸짖으신다는 것.

*긍휼의 하나님은 지구 저 위에 앉아 우리를 지켜보며 그저 안 됐다고 생각하실 수만은 없어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본성을 취하시고 말 그대로 인간의 신을 신고 우리 상황과 문제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와 동행하셨다는 것.

*만약 정말 어려운 시간을 보내는 친구가 주위에 있다면 핑계를 대지 말고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라고 하네. 주께서 그러하신 것처럼. 그 고통의 터널을 그와 함께 걸으라고 해.

그러다 보면 울게 될 것이고, 마음이 아플 것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라고 하네.

어쨌거나 받는 자의 입장보다 나눌 수 있는, 줄 것이 있는 내가 복이 많은 자라는 것은 분명하니까.

여기까지. 요나서를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며. 20230206.